- 여우주머니의 가을
이 아침, 창밖으로는 안개가 가득합니다. 나무 끝자락의 색들이 살짝 바뀌는 사이, 산의 모습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습니다. 바라보고 또 보아도 또 보고 싶은 풍경입니다.
푸르기만 했던 잎사귀들의 색이 빨갛게, 노랗게 변해가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놀랍습니다.
저 어여쁜 색들은 도대체 나무의 어디에 숨어 있다가 저토록 눈부시게 나타나는 것일까요? 봄부터 가을이 깊어질 때까지 잎사귀들은 그 모든 소란스러움을 견디며 자신만의 색을 비밀스럽게 감추고 살아왔나 봅니다.
내 안에는 어떤 색들이 있을까요?
내 안에도 내가 모르는 고운 색들이 숨어 있어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 조용조용히 떠오르다가, 어느 가을날 마침내 나도 저 잎사귀들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뀔 수 있을까요?
나의 크랙 정원도 이제 서서히 시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내게는 많은 꽃들이 보입니다.
명아주, 강아지풀, 붉은서나물, 여뀌, 꽃향유, 까마중, 냄새명아주...
사진으로는 담아두었지만 끝내 ‘이야기’가 되지 못한 꽃들도 있습니다.
장구채, 광대나물, 개비름, 닭의덩굴, 쇠비름, 박주가리, 뽕모시풀, 개갓냉이, 주름잎...
무엇보다 이 정원의 문을 너무 늦게야 연 탓에 봄부터 초여름의 꽃들은 몇 개를 제외하고는 돌아볼 기회마저 없었네요.
제비꽃, 양지꽃, 큰개불알풀, 꽃다지, 냉이...
그리고 공부가 부족한 탓에 눈길조차 보내지 못하고 지나친 꽃, 또는 보았으나 그 이름을 아직은 알지 못하는 꽃...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내 소박하나 풍성한 정원을 계속 가꾸어 가고 싶습니다.
꼭 해보고 싶은 것은 식물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담아내는 일입니다.
내가 본 꽃은 식물의 한 살이 중 어느 한 순간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식물들은 계속 변해갑니다.
대부분의 식물들은 꽃이 진 후에도 그 모양이 크게 변하지 않아 그럭 저럭 알아볼 수 있다지만, 간혹 내가 담았던 그 모습과 크게 달라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열매...
꽃들의 마지막 성취, 그들의 소중한 열매들을 담아보고 싶습니다.
크랙 정원의 그 작은 꽃들에게도 가을은 오고야 맙니다.
‘여우주머니’에게도 가을이 왔습니다.
내 걱정처럼 많은 여우들이 뽑히고 잘려나갔지만 그래도 이렇게 남아 가을을 아낌없이 보여주는 아이들이 있네요. 알알이 달고 있는 저 소중한 열매들이 여우주머니의 한 살이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순간순간 삶이 고단했을지라도 한 번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 낸 흔적일 것입니다.
찬란한 보석들입니다.
숨 가쁘게 달려 왔다는 느낌이 드는 오후, 일단 한 숨 크게 들이쉬고 천천히 다시 정원으로 나가렵니다.
고운 빛, 아름다운 색으로 익어가는 계절...나는 이 정원이 있어서 여전히 행복합니다.
그리고 가을은 이제 막 도착했습니다.
나는 아직 길게 남은 ‘색채’와 '열매'들의 가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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