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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랙 정원에서...

빨간 열매, 까만 열매

- 눈 속 열매들

 

 

아파트 마당 마가목의 탐스러운 열매에 눈이 내렸습니다.

 

 

 

 

가지가 휘어질 듯 풍성하게 열린 산수유의 빨간 열매에도 눈은 내려 쌓였습니다.

유혹적인 자태에 눈이 부십니다.

 

 

 

 

아파트의 담장마다 자라나 여름 내내 수줍은 초록의 잎을 보여주었던 쥐똥나무에도 까만 열매가 맺힌 것을 눈이 내린 오늘에야 발견하게 되었네요.

 

 

 

 

동네의 작은 교회 앞마당에 담장을 겸해서 심어 놓은 주목에도 빨간 열매는 어김없이 달렸습니다. 

 

 

 

 

서리를 맞으며 시들어 가던 거리의 까마중에도 눈이 내려앉았습니다. 눈의 무게조차 까마중에게는 버겁기만 합니다. 이 눈이 녹고 또 눈 녹은 물까지 마르면 까마중도 긴 잠에 빠져들겠지요.

 

 

 

 

배풍등의 붉은 열매가 눈바람에 흔들 흔들 흔들립니다. 영롱하게 반짝이던 열매, 그 작은 열매에 내려앉았던 눈은 바람에 날아가버렸지만 겨울은 마른 잎새 위로 길게 남을 것입니다.

 

 

 

 

내려 쌓인 눈 때문에 신이 난 초등학생들의 등굣길, 재잘거리는 소리에 파묻혀 사철나무의 열매도 톡톡 터집니다. 

 

 

 

 

병아리꽃나무의 까만 열매 위로 내렸던 눈은 녹았다가 다시 얼어 눈이라기 보다는 얼음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열매가 짊어지고 있는 무게를 안쓰럽게 바라봅니다.

 

 

 

 

동네의 작은 공원, 남천의 열매가 풍성합니다. 눈의 질감이 첫날, 첫눈의 그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이렇듯 처음과 같지 않습니다. 그래도 열매는 여전히 참 예쁘네요.

 

 

 

 

여름 동안 그렇게도 극성을 부리던 환삼덩굴에도 열매가 달렸습니다. 유해식물이라 하여 늘 천덕꾸러기 신세, 그 꽃조차 자세히 들여다본 적 없으나 어느새 곱게 익은 열매를 보니 코끝이 찡합니다. 

 

 

 

 

끈질기게 꽃을 피우던 애기똥풀의 열매는, 채 지지도 못한 꽃과 함께 눈의 겨울을 맞이하고야 말았습니다. 

 

 

 

 

동네의 작은 성당과 아파트 앞마당 감나무에도 미처 떨어지지 않은 감들이 까치들이 날아올 날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첫눈 치고는 폭설에 가까웠던 지난 이틀 간의 눈 세상에서 내 눈은 무척 행복했습니다. 거실에서 바라보는 설경이 어찌나 눈부신지 실내에서도 선글라스를 써야 하는가 싶을 정도로 빛나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동안 내가 담아 온 크랙 정원의 꽃들은 사람들이 애써 심고 가꾸는 식물들이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야생입니다. 그 차이가 모호할 경우도 있지만 역시 내 관심은 '절로 나서 절로 자라고 꽃을 피우는 식물'들입니다. 눈 속을 거닐며 찍어 본 열매들은 크랙 정원의 것은 아니었지만, 하얀 눈이 크랙 정원의 틈 사이를 메우고 있는 사이 눈을 들어 바라본 풍경이 너무도 황홀했습니다. 모든 것을 덮어주는 눈은 야생과 야생이 아닌 식물들의 차이까지도  가려주는  같습니다. 절대적인 아름다움 앞에서 잠시 모든 구분의 무의미함, 무가치함을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눈 속 식물의 모습을 찍는다는 것은 시간과의 싸움입니다. 

적당한 대상을 찾는 것도 쉽지는 않지만, 열매나 꽃 위에 내려 앉은 눈을 담을라 치면 그 가벼운 깃털들은 걸핏하면 흩어져 버리기 일쑤입니다. 또 눈은 너무도 쉽고, 너무도 빠르게 녹아내려 처음의 그 느낌은 내 짧은 기억 속에만 살아 있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을 기계 장치에 담는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실감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눈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그 허망함 그 연약함... 금방 소멸해 버리는 환상 같은 성질 때문은 아닐까요?  ‘아, 예뻐!’  하며 손으로 잡는 순간 그 환상은 바로 사라집니다. 카메라로도 온전히 담아낼 수 아름다움, 끝내 현실이 되지 못한 희망,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꿈의 세상이 바로 눈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눈에 열광하는가 봅니다.  

    

열매들은 눈이 없이도 아름다웠겠지만, 눈이 있어서 더욱 빛나 보였습니다. 

다음에 또 눈이 내린다면 이번에 미처 눈길이 닿지 못했던 다른 식물들의 열매를 담아보고 싶습니다. 

 

         

잠시 쉬어 가는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