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 봄, 변치 않고 찾아온 작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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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침 눈을 뜰 때는 분명 창밖으로 흰 눈이 소리도 없이 내려 쌓이고 있었는데, 봄은 너무 급작스럽게 들이닥쳤습니다. 한낮의 온도가 20도를 넘다니요.
거리로 나섭니다.
내 크랙 정원의 꽃들은 게으름도 피우지 않고 벌써 기지개를 켜고 있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어느 새 광대나물, 개불알풀, 서양민들레, 점너도나물, 별꽃이 피어났고, 뒤 산의 생강나무도 꽃을 피워 야릇한 향을 내뿜고 있습니다. 이웃 아파트 정문 옆 영춘화에도 봄은 한창이었습니다. 회양목의 은은하면서도 강렬한 향도 산책길의 기쁨 중 하나입니다. 오직 나만 아직 늦은 밤의 불면과 이른 아침의 두통, 막연한 우울과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감정의 위기 속에서 어둔 겨울을 헤매고 있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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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영춘화, 오른쪽은 회양목의 꽃입니다.>
지난달에는 오래 벼르던 이집트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주로 고대 이집트의 유적, 유물을 중심으로 보다 보니 깜짝 놀라운 감동보다는 왠지 그걸 것이라 예감했던 것들을 새삼 확인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힘듭니다.
달랑 열흘 정도의 여행을 통해 그 나라의 역사나 예술의 특징을 이해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겠지만 얼핏 가장 강한 느낌은 ‘참으로 긴 시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많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길고 천천히 흐르던 나일강, 그 강가에 펼쳐진 종려나무의 풍경, 최신형 고급 승용차가 다니는 도로에서도 여전히 당나귀를 타고 느리게 느리게 움직이는 사람들, 그리고 거대한 돌에 새겨진 그들의 다양하고도 수많은 신(神)들과 왕, 그리고 여왕들, 마찬가지로 거대한 돌로 쌓아 만든 신전들...돌, 돌, 돌... 지난 가을 다녀왔던 중국의 사천성 석불(石佛) 기행에서는 상대적으로 짧은 시기에도 변화하는 양식과 그 표현의 변주가 현란해서 따라 잡아 이해하기가 벅찼었는데, 이집트의 유적들에서는 그처럼 촘촘한 변화가 느껴지지 않아 놀랐던 것입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에게는 더 이상 나아질 수 없는, 또는 바꿀 필요가 없이 완벽한 이데아의 세계가 이미 태고에 존재했기에, 그렇다면 그들이 해야 할 일은 그 완벽한 전범(典範)에 따라 자신들의 기술을 갈고 닦아 더욱 더 완벽하게 그 이상에 다가가는 것일 뿐인 것이었겠다는 나름의 허술한 이론을 만들어 보기도 합니다. 완벽한 아름다움, 진리를 보존하기에 가장 적합한 재료는 ‘돌’이 아니었을까요? 돌에 비하면 쇠, 종이, 디지털 매체 모두가 불완전하고 일시적인 장치들입니다. 거대한 돌기둥에 새겨진 그들의 이데아를 보며 든 생각이었습니다.
변화는 ‘아직은 부족하다.’는 자각으로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그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변화를 시도하고, 그 결과는 때로는 ‘발전’으로 때로는 ‘퇴보’로 귀결될 수도 있겠지요. 물론 이런 사고나 생활양식이 가능했던 데에는 무엇보다 나일강이 선사했던 비옥한 토지와 그에 기반 한 높은 생산력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을 것입니다. 이런 높은 생산력을 기반으로 한 이집트는 ‘완벽한 이상향 이집트’이기에 바깥세상의 야만과 혼돈을 향해 열어 둘 필요가 없는 ‘닫힌 이집트’ 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그들은 수 천 년 동안 같은 양식의 그림과 조각, 건축물을 가장 변하지 않는 영원한 ‘돌’ 위에 새기고 그리고 쌓아올린 것 아닐까요? 끊임없이 파도가 치고 많은 소중한 것들까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자본주의의 세상에서 본다면 이집트의 그 불변함, 영원성은 참으로 놀랍고도 생경한 모습이었습니다. 변화, 그리고 대체로 변화를 통해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소위 발전(發展)이라는 환상이라면 그러한 패러다임 자체는 특정 시기에만 통용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많은 고대의 신(神)들과 만났지만 그중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태양신 '라'의 딸이자 '호루스'의 부인인 '하토르' 여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덴데라 신전의 주신이기도 한 이 하토르 여신의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원본은 왕비들의 계곡에 있는 람세스 2세의 왕비였던 ‘네페르타리’의 무덤의 벽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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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은 마침 대보름의 아름다운 달이 떠오른 룩소르 신전의 오벨리스크를 담은 사진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들, 비록 인간의 시간으로이긴 하지만 영원한 것들이라는 한밤의 감동, 여행객의 소회였답니다.
자, 이제 냉이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왜 하필 냉이일까? 왜 새 해의 첫 꽃으로 냉이가 내 마음 속으로 들어왔을까?
봄날의 도시 산책길에는 어느 새 이곳저곳에 냉이가 피어나 자잘하고 귀여운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새롭지 않기에 오히려 '변함없다.'는 느낌으로 다가온 꽃! 그것이 답이라면 답일 수 있겠네요.
그 꽃들을 반가운 마음으로 맞이하며 나는 중얼거려 봅니다. ‘너희는 참으로 변하지 않고 이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다시 꽃을 피우는구나!’ 아니 ‘꽃을 피워주는구나!’
물론 '변함이 없다.'는 생각도 인간의 시간 스케일에서 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는 내가 다른 시간의 스케일을 상상하는 것도 주제넘은 생각일 것 아닐까요? 고작 5천년의 '불변함'도 '영원'처럼 느껴졌을진데 더 오랜 시간 이 땅 위에서 피고 지고 다시 피어났을 그 작은 꽃을 생각합니다. 지난 겨울을 지나며 나는 마치 다른 세상, 내가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는 세상에 내동댕이쳐졌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처럼 변함없이 피어나는 이 작은 꽃이 너무도 눈물겹게 느껴져서 하는 말입니다. 작년, 재작년, 그 전의 봄날에도 보았던 그 봄꽃을 다시 본다는 것만으로도 코끝이 찡해지는 감동이 몰려옵니다. 말하자면 냉이 그 작은 꽃이 내 세상의 연속성을 증거해 주는 것 같았다고나 할까요?
당분간 이 작은 냉이들은 꾸준히 꽃을 피우고, 줄기를 쑥쑥 올리고, 짧은 시간 안에 마침내 열매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년에 , 그리고 그 다음 해에, 그리고 그 다음 해에도 봄이 되면 변함없이 제일 먼저 꽃을 피워 올릴 것임을 나는 믿게 됩니다.
생각난 김에 냉이된장국을 끓여 저녁을 먹습니다. 땅에서 바로 올라오는 야생의 것이 아니라 그런지 싱거운 맛이어서 조금은 섭섭합니다만 그래도 이 봄 냉이 된장국을 건너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땅 위로 피어나는 작은 꽃에 비해 그 튼실하고 질긴 뿌리야말로 냉이의 진면목은 아닐까 생각도 해봅니다.
냉이는 정말 어느 곳에서나 피어납니다. 야산의 언저리, 들판, 전신주나 가로수 아래의 흙, 돌 틈 사이 그리고 크랙 정원의 대표 꽃답게 보도블록의 틈새에서도 피어납니다. 무리지어 피어나는 모습을 좋아하긴 하지만 이 이른 봄, 크랙 정원에서 한 두 개체씩 피어나는 모습도 대견합니다.
냉이가 이처럼 이른 봄에 다른 꽃들 보다 일찍 피어날 수 있는 이유는 그 방석을 닮은 뿌리잎 때문입니다. (사진 1번) 가을에 씨앗이 싹터서 잎을 키우다가 겨울을 맞으면 땅에 딱 붙은 것 같은 모양의 이 로제트잎으로 겨울을 나는 것입니다. 따뜻한 곳에서는 잎의 색이 약간 불그스름하고, 마른 상태로 겨울을 견뎌내다가 봄이 되면 차츰 녹색으로 바뀐 후 봄이 오면 이윽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만들고는 한살이를 끝내는 것입니다. 이렇듯 이 로제트잎은 차가운 겨울바람을 잘 견디게 해 줄 뿐 아니라, 잎의 표면적을 넓혀서 겨울 동안에도 광합성을 해서 그 영양분을 뿌리에 저장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우리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이 통통한 뿌리를 봄에 캐서 봄날의 밥상에 올릴 수 있는 것이지요. 냉이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렇게 저장된 에너지원을 재빠르게 이용해서 봄이 오면 다른 어느 식물들보다 일찍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입니다.
냉이의 꽃은 전형적인 십자화과 식물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글자 그대로 넉 장의 꽃잎이 열십자(十) 모양으로 피어나는 것이지요. 그 희고 작은 꽃잎 가운데 하나의 암술과 6개의 수술들이 옹기종기 들어앉아 있는 모습이 앙증맞네요. (사진 4번)
냉이는 꽃도 귀엽지만 그 열매도 참으로 사랑스러운 모양을 하고 있지요.
가운데가 오복 들어간 하트 모양 혹은 역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는 열매를 많이 보셨을 테지만 별로 크게 의식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냉이의 종소명은 bursa-pastoris 인데 bursa는 라틴어로 '지갑'을 뜻하고, pastoris가 '양치기'를 뜻한다고 합니다. 냉이의 영어명이 shepherd's purse(양치기의 지갑)라고 하는데 이 이름의 유래도 같은 맥락에서 냉이의 열매 모양에서 나온 것입니다. 냉이는 그 꽃보다는 열매가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실제로 황새냉이, 말냉이, 좁쌀냉이, 싸리냉이, 는쟁이냉이, 미나리냉이...등 냉이 종류는 상당히 많지만 각각의 열매 모양은 놀라울 만큼 서로 다릅니다. 마침 성질 급한 냉이들 중 몇몇이 벌써 열매를 달고 있네요.
가운데가 쏙 들어간 모양의 결실을 달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서 상 양치기의 지갑이라는 이름은 귀에 쏙 들어오질 않고 오히려 제 눈에는 아주 작고 어여쁜 부채처럼 보이네요.
냉이는 이른 봄 그 누구보다 빨리 꽃을 피워서 겨우내 웅크리고 있었던 우리들의 마음을 즐겁게 할 뿐 아니라, 겨우내 통통해진 뿌리와 잎으로 봄날의 기운을 돋구어주는 고마운 먹을거리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늘 우리네 삶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던 꽃이지요.
잊었던 옛 동요를 조용히 불러 봅니다.
동무들아 오너라, 봄맞이 가자.
너도 나도 바구니 옆에 끼고서,
달래 냉이 씀바귀 나물 캐오자.
종다리도 높이 떠 노래 부르네.
살아오면서 쑥은 몇 번 캐어 봤지만 달래 냉이 씀바귀는 한 번도 캐본 기억은 없지만, 귀에 익은 가락, 입에 착 붙은 노랫말이 마치 내가 실제로 경험한 봄날인 것만 같습니다.
올해도 변하지 않고 도시로 찾아와 준 냉이가 대견하고 눈물겹습니다. 그저 내가 사는 이 세상, 이 덧없이 짧기만 한 시간 속에서도 이처럼 익숙하고 아름답고 좋은 것들은 변하지 않고 남아주기를 바라게 되는 봄날입니다.
Capsella bursa-pastoris (L.) Medik. 피자식물문 >목련강 >딜레니아아강 >풍접초목 >십자화과 >냉이속 > 냉이 풍접초목 십자화과에 속하는 관속식물이다. 햇볕이 잘 드는 공터, 길가에 자라는 두해살이풀입니다. 뿌리는 곧고 흰색이며, 줄기는 곧추서고 가지가 많이 갈라집니다. 전체에 털이 있고 뿌리에서 나는 잎은 여러 장이 모여나서 땅 위에 퍼지고 깃꼴로 갈라지는데 비해 줄기에 나는 잎은 어긋나며 피침형인데 밑이 귓불 모양으로 되어 줄기를 반쯤 감싸줍니다. 꽃잎은 4장이고 열매는 양쪽이 납작한 역삼각상 모양이고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간 모양입니다. 이런 점이 같은 과 내의 모든 종들과 구별되는 점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전역에 나며, 전 세계에 분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