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크랙 정원의 꽃들

여우주머니

여우는 주머니만 남기고 어디로 숨었을까?

 


<앞쪽이 수꽃, 뒤쪽이 암꽃입니다. >

 

 

도서관이 집 가까이 있다는 것은 큰 행복입니다.

마음 내키는 시간에 5분 거리에 있는 도서관에 가서 읽을 만한 책을 골라 대출하고 때로는 열람실에 눌러 앉아 여러 시간 책을 읽기도 합니다. 더운 여름날에는 에어컨을 빵빵하게 켜놓아 시원해 좋고, 추운 겨울날에는 따스하게 난방이 되니 천국이 따로 없습니다. 게다가 도서관쟁이(?)들은 조용하고 겸손합니다. 지하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들은 다른 세계의 이야기 같답니다. 돋보기 안경을 낀 노인분들은 외국어 신문이나 잡지를 뒤적거리시면서 여유를 보이시고, 취준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도 모두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다가 배가 고프면 잠시 나와 큰 길 건너에 있는 기사식당에서 된장찌개 백반을 먹고 다시 들어가 책을 보는 것도 작은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

 

며칠 전 다녀 온 북유럽 여행은 퍽 행복했습니다. 특히 분홍바늘꽃이 끝도 없이 피어있던 노르웨이의 풍광은 환상적이었습니다. 빙하도 피요르도 무척 멋졌지만, 분홍바늘꽃 이외에도 루핀, 서양톱풀, 터리풀, 구절초, 눈개승마, 장구채, 미나리아재비, 꿀풀, 벌노랑이, 붉은토끼풀 (물론 그 꽃들이 정확히 이 꽃들인지는 자신할 수 없습니다.) 등등의 꽃이 이제 막 하지를 지나 백야가 지속되는 고위도의 땅을 꽃의 천국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꽃들은 얼마나 바빴을까요? 나날이 짧아지는 낮 시간을 계산하며 얼른 피어 씨앗을 남기려 그토록 맹렬하게 피어난 것이겠지요? 그 덕분에 이 여행은 꽃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길, 아름다운 날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여행에서 돌아와 현실 속으로 걸어 들어오려니 웬일인지 시차 적응이 빠르게 되질 않고, 허공에 붕 뜬 마음은 정리되지 않은 채 어지럽기만 했습니다. 이럴 때 나는 범죄소설을 읽습니다. 감정 이입에 따른 소모 없이 기계적으로 읽어내려 갈 수 있는 소설들...그래서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책 몇 권을 대출받아 돌아오는 길, 도서관에서 채 10m도 떨어지지 않은 아파트 앞 보도 블럭의 틈 사이에서 특이한 모양의 잎사귀를 발견합니다. ‘혹시 여우주머니가 아닐까? 그럴 리가...그 꽃을 보려고 남한산성을 헤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봅니다. 잎 뒷면에 쪼르르 매달린 작은 구슬들...여우주머니가 맞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듬성듬성 여러 개체가 눈에 띕니다. ‘핸드폰으로라도 찍어볼까? 에효~~이렇게나 더운 날...의미 없다. 더위 먹기 전에 집으로 들어가자. 꽃에 대한 지나친 열정이나 꼭 사진으로 담겠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집착, 봤으면 그걸로 되었으니 집에 가서 빌려온 책이나 읽으며 더위나 식혀보자!’라고 스스로를 달래봅니다. 이 때쯤 나는 이상한 무기력과 무감각증에 빠져 있었거든요.

밤에 자려고 자리에 누웠는데 잠이 쉬이 오질 않습니다. 두고 온 여우주머니가 눈에 밟힙니다. 하필 자동차들이 바쁘게 지나다니는 길목에 피었으니 사진 찍기가 쉽지는 않을 거야. 운전자들에게 욕을 먹을 수도 있을 터이고...출근 시간이 살짝 지난 후 나가서 찍어보자.

 

다음 날 10시 용감하게 나서봅니다. 예상대로 찍기가 참으로 난감합니다. 아파트 담장 쪽에 핀 꽃들은 장마비로 쑥쑥 자라난 다른 식물들 때문에 배경이 너무 어지럽고, 길가 쪽에 핀 꽃들을 찍으려 길로 내려서면 차들이 빵빵거리고...

 

그래도 어찌어찌 찍고 돌아와 보니 정작 꽃이  보이지 않네요. 도감을 찾아봅니다. 아, 암꽃과 수꽃이 따로 있는데 사이좋게 한 그루에 핀다고 하네요. 꽃을 보지 않고 열매만 보아서는 곤란하지...

 

다음 날 다시 나갑니다. 조금 더 일찍. 이제 무기력증은 멀리 날아가 버렸고 다시 익숙한 열정이 마음속에 차오릅니다. 그러나 꽃을 찍는다는 것, 중노동과 다름 없습니다. 잎겨드랑이에 달려서 땅바닥에 엎드리지 않으면 들여다보기가 쉽지 않은 데다가 바람이 살짝만 불어도, 아니 내 입김에도 마구 흔들리는 그 줄기에 달린 작디작은 꽃이 원망스럽습니다.  간신히 몇 장을 찍고 돌아옵니다.  돌아와 살펴보니 아, 사랑스러워라! 암꽃과 수꽃이 나란히 붙어 피어있습니다. 중노동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사랑스러운 꽃, 암꽃과 수꽃이 나란히 붙어 피어있습니다. 

 

그날 밤, 나는 다시 상상의 나래를 폅니다. 꽃도 보고 열매도 보았고...이제 그 귀여운 잎사귀에 단풍이 들어 곱게 단장한 모습만이 남았습니다. 붉은 빛 그 예쁜 모습이 눈에 잡힐 듯 생생합니다. 그 때 쯤이면 열매도 노랗게 익었겠지? 하지만 또 생각해 봅니다. 단풍이 들 때까지 이 아이들이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화단이나 보도 블럭의 틈새에 핀 꽃조차 잡초라 하여 견뎌내지 못하는 도시의 깔끔함에 행여 뿌리 채 뽑혀 나가지나 않을까? 추석을 앞 둔 시기에 예초기에 잘려나가지는 않을까? 이것이 이 아이들의 올해 마지막 모습은 아닐까? 걱정거리가 새롭게 생겨납니다. 그러나 걱정을 한들 내가 무엇을 어쩌겠습니까? 그것이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지요. 그래도 뿌리까지 야무지게 뽑혀나가지만 않는다면 내년에는 다시 올라온 줄기에서 잎이 돋아나고 꽃이 피고, 그리고 이윽고 열매 맺는 모습을 볼 수 있을 테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용케 사람들의 손길을 피해 곱디 고운 빛깔로 익어가는 여우주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날도 오겠지요.

 

여우주머니는 꽃은 너무 작아서 많은 이들이 보지 못하고 지나치기 때문인지 그 이름도 꽃이 아니라 열매의 모양에서 유래합니다.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식물이고, 한번 들으면 좀처럼 잊히지 않는 이름이지요. 여우...옛 이야기 속의 여우는 사람을 홀리는 기술로 위험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어여쁜 여자로 변신하는 사랑스러운 존재이기도 하지요. 양면성...여우는 이렇게나 많은 주머니를 남기고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요? 여우의 주머니를 열면 그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요?

 

어떤 이들은 여우주머니라는 이름이 붙은 사연을 이렇게 풀어보기도 합니다. 먼저 여우는 그 잎의 모양이 여우의 꼬리를 닮아서 이고, '주머니'라는 이름은 옛날 한약방 처마 아래 줄줄이 걸어 놓은 한약 봉지와 비슷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들어보면 수긍이 갑니다. 특히 열매 자루가 길어서인지 그런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이제 흥분을 갈아 앉히고 암꽃과 수꽃이 나란히 피어있는 여우주머니의 꽃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해 보려 합니다.

 

생명체에 있어서 성()은 번식을 위해 마련된 섬세한 장치입니다. 생명체들이 최초로 자기복제를 시작했을 때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아마도 생식기관 없이 영양기관의 세포분열만으로도 가능한 무성생식이었을 것입니다. 무성생식은 상대적으로 에너지 소모가 적고 쉬운 방법이긴 하지만, 유전적으로 열성 인자가 나타나는 경우가 많고 다양성을 얻기 어려워 이런 저런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유전적 다양성을 얻기 위한 성의 구분, 멋진 해법입니다.

꽃을 피우는 속씨식물(현화식물)은 당연히 암수 구분이 되는 유성생식을 하는데 한 송이의 꽃에 암술과 수술이 있는 경우를 양성화라고 하고, 암꽃과 수꽃이 각각 따로 있는 꽃은 단성화라고 합니다. 이 단성화 중 꽃이 각각 다른 개체에서 피는 경우 암수딴그루’(자웅이주), 같은 식물에서 피는 경우 암수한그루’(자웅동주)라고 합니다. 간단히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단성화 : 암꽃과 수꽃이 따로 있는 꽃
  1-1. 암수딴그루
  1-2. 암수한그루
2. 양성화 : 한 꽃 안에 암술과 수술이 함께 있는 꽃

 

현재 알려진 식물의 꽃 가운데 약 70퍼센트가 양성화입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꽃 사진을 찍을 때면 이번 여우주머니의 경우처럼 의례 양성화라고 전제하며 찍게 되고 뒤늦게 단성화임을 알고 나서 허둥거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멀리까지 가서 힘들게 찍어 온 경우는 며칠 동안 속상해하며 이불킥을 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고개를 듭니다, 왜 양성화가 유독 많은 것일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양성화가 제꽃가루받이의 가능성이 큰데도 말이죠.

 

꽃가루를 이동시켜 주는 매개 곤충을 이용하는 방법이 꽃가루받이 방법 중 가장 효율적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꽃가루받이라는 것은 결국 수술이 만든 꽃가루가 암술머리에 붙으면서 일어날 수 있는 이벤트입니다. 만약 어떤 식물의 꽃이 암꽃과 수꽃으로 나뉘어져 있다(단성화)고 가정해 봅시다. 곤충이 암꽃에 먼저 들른 후 수꽃으로 날아간다면 꽃가루는 낭비되는 셈이 됩니다. 반대로 수꽃에 앉았다가 꽃가루를 묻힌 후 다시 날아간 곳이 역시 수꽃이라면 이 또한 꽃가루의 낭비지요. 이 때 암술과 수술이 한 꽃 안에 같이 있다면 곤충이 한번 꽃을 찾는다 해도 이런 문제는 상당히 많은 부분 해결이 됩니다. 양성화가 대세인 까닭이 이해되네요.

 

그러나 양성화의 경우 늘 근친교배의 위험성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식물들은 제꽃가루받이를 피하기 위한 여러 가지 장치들을 준비해 두었답니다. 가장 일반적인 것은 암술의 길이를 길게 하는 방법입니다. 꽃술을 보면 대부분이 암술머리가 수술들보다 높이 솟은 모양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밖에도 같은 종의 식물이 수술과 암술대의 길이를 달리하는 두 종류의 꽃(장주화와 단주화)을 피우는 방법도 있답니다. 이화주성(二花株性)이라고 하는데 길이가 긴 암술머리에는 긴 수술에서 나온 꽃가루만 수분되고, 반대로 길이가 짧은 암술머리에는 길이가 짧은 수술에서 나온 꽃가루가 수분되어 제꽃가루받이를 피하는 전략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꽃인 개나리도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다니 봄에 개나리꽃이 피면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또 수술과 암술의 성숙 시기를 달리 하는(자웅이숙)방법도 있습니다. ‘뻐꾹나리라고 하는 특이한 생김새를 가진 꽃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볼게요.

 

높게 솟아올라 있는 것이 암술과 수술입니다. 그 중 얼룩무늬가 있는 것이 암술 3개로, 그 끝은 다시 2갈래로 갈라져 있습니다. 암술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여섯 개의 수술이 보이네요. 참 특이한 모양이지요? 그러나 꽃가루받이의 방식은 더욱 기발합니다. 수술이 먼저 성숙하면서 굽어져 아래로 향합니다. 아래로 굽기에 그 꽃가루가 자신의 암술머리에 붙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집니다. 이윽고 찾아 온 곤충의 등에 수술의 꽃가루가 묻으면 수술은 이제 위로 향하고, 기다렸다는 듯 암술이 성숙하여 아래로 내려오면서 수술이 있던 자리를 대신하게 됩니다. 꽃가루를 등에 묻힌 곤충이 이꽃 저꽃 날아다니면서 아래로 내려온 암술머리에 꽃가루를 묻히면서 딴꽃가루받이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생김새만이 아니라 번식 전략도 탁월한 꽃이네요. 아닙니다. 순서가 잘못됐습니다. 그 신기한 생김새 자체가 자웅이숙이라는 전략을 구사하기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진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겠지요?

 

그밖에도 긴 모양의 꽃차례를 가진 꽃의 경우 암꽃은 위를 향하게 하거나 위쪽에 배치하고 수꽃은 아래를 향하게 하거나 아래쪽에 배치함으로써 제꽃가루받이를 막는 방법도 동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수술이 만들어낸 꽃가루가 암술머리에 옮겨 붙을 경우 수술이 화학물질 등을 이용하여 씨가 만들어지지 않도록 하는 고도의 전략까지 동원됩니다. 이 방법을 자가불합화성이라 하는데 근친교배를 막는 가장 중요한 수단 가운데 하나입니다. 꽃들, 참 대단하지요?

 

이야기가 한껏 길어졌는데 다시 여우주머니로 돌아가 봅니다.

암수가 한그루에 딱 붙어서 피어있는 여우주머니의 생식전략은 무엇일까요?

양성화의 이익은 챙기면서, 문제점도 해결해 보고자 하는 전략일까요? 아니면 그저 단성화에서 양성화로 진화하는 도정에서 나타나는 모습일까요? 저는 일 길이 없습니다. 다만 사이좋게 붙어 피어난 그 작은 꽃들이 인간 사람인 제 눈에는 더없이 다정하고 귀엽게 보입니다.

 

 

여우주머니의 발견은 내게는 정말 큰 사건(?)이었습니다. 크랙 정원의 꽃들에 대한 선입견을 싹 없애버린 발견, 말하자면 대박이었죠. 때로는 이렇게 생각하지도 못했던 꽃을 그 좁은 틈새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고, 이 발견을 계기로 동네의 크랙 정원들을 다시 한번 걸어서 답사해 보았습니다. 의외로 멋지고 큼직한 식물들이 많더군요. 무릇, 장구채, 반하, 망초, 명아주...그러나 다른 꽃들이 듣지 못하게 작은 소리로 고백해 봅니다. 크랙 정원의 꽃 중에서 여우주머니만큼 나를 행복하게, 황홀하게 해준 꽃은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여우주머니를 담아온 그 날, 오랜만에 잠이 푹 들었습니다. 이제야 시차 적응이 되었나 봅니다. 드디어 노르웨이의 꽃길 대신 여우의 깜찍한 주머니 꿈을 꿀 차례입니다.

 

 

마지막으로 마치 그림으로 그린  멋진 여우주머니의 사진을 한장  소개해 봅니다!

 

 

 

 

 

 

Phyllanthus ussuriensis Rupr. & Maxim.
피자식물문 >목련강 >장미아강 >대극목 >대극과 >여우주머니속 >여우주머니


꽃은 6~7월에 암수가 한 그루에서 피며, 잎겨드랑이에 1~2개씩 달리고, 녹색이 도는 노란색입니다. 암꽃은 꽃잎처럼 보이는 꽃받침조각이 6개 있고 암술대는 3개인데 각각 2갈래로 갈라집니다. 수꽃에는 꽃받침잎 4~5, 수술은 2개이고 꿀샘덩이가 4개 있습니다.
열매는 8~9월에 익는데 지름 3mm쯤의 납작한 공 모양이고 겉에는 돌기가 있습니다. 연한 황록색으로 익으면 3갈래로 갈라지며 열매자루가 있어서 마치 작은 구슬이 매달린 듯 귀엽습니다. 비슷한 종의 식물인 여우구슬은 열매가 적갈색으로 익으며, 겉에 돌기가 많고, 자루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서로 구분됩니다.

'크랙 정원의 꽃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민들레/서양민들레  (1) 2024.08.18
괭이밥  (0) 2024.08.17
중대가리풀  (0) 2024.08.15
덩굴해란초  (0) 2024.08.14
꽃마리  (0) 2024.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