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밀한 전략가, 속임수에도 급(級)이 있다.
이사를 했습니다. 살던 장소를 옮겨가는 ‘이사’가 이토록 힘겹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평소에 가지고 살던 것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모든 것들을 돌돌 말아 낙타 등에 얹어 가볍게 살 곳을 옮겨 다니는 유목민들의 삶을 보며 한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이 과연 얼마 만큼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삶이 한없이 무겁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살던 집을 정리하고 힘들여 이사를 하고 나니 이번에는 현실로 다가온 ‘낯섦’의 벽에 부딪힙니다.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묶어둔 짐을 풀어야 하는데 가위는 보이질 않습니다. 연락해야 할 곳도 많고 받아야 할 전화도 많고, 전화를 받고는 급히 받아 써야 할 것이 생기자 사방을 두리번거리지만 그렇게도 흔하던 메모지가 도통 보이질 않습니다. 새로 들여야 할 가구의 위치를 정하기 위해서는 줄자가 꼭 필요한데 그 놈의 줄자는 사흘을 찾았지만 행방이 묘연합니다. 걸레는 또 어떻고요? 제 자리에 있어야 할 모든 물건들이 마치 태풍이라도 휩쓸고 간 것처럼 뒤죽박죽, 짜증이 납니다.
하찮은 것들이라 생각되어 뇌리 속에 그 위치를 ‘콕’ 새겨두지 않은 탓이겠지요. 중요한 것들은 비교적 쉽게 찾아낼 수 있건만 정작 생활에 꼭 필요한 자잘한 것들이 쉽게 손에 잡히지 않으니 그 불편함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이 와중에 남편이 짜증을 냅니다. 어쩌자는 거지? 난들 그것들이 어디에 박혀있는지 알 수 있나? 나만을 위해 집을 옮기는 거야? 속에서 열불이 올라옵니다. 이제 불편함은 부부간의 전쟁으로 비화할 조짐이 보입니다. ‘사소한 것’들의 소중함, 내 몸에 꼭 맞는 익숙한 공간의 편안함이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느닷없이 좋아했던 노래가 떠오릅니다.
나는 떠날 때부터
다시 돌아올 걸 알았지
눈에 익은 이 자리
편히 쉴 수 있는 곳
많은 것을 찾아서 멀리만 떠났지
난 어디 서 있었는지
하늘 높이 날아서
별을 안고 싶어 소중한 건
모두 잊고 산 건 아니었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그대 그늘에서 지친 마음 아물게 해
소중한 건 옆에 있다고
먼 길 떠나려는 사람에게 말했으면
.......................................................
피곤과 짜증이 겹겹이 쌓여서인지 대중가요가 갖는 소박한 진실과 그 진실만이 가지는 아름다움에 울컥 목이 멥니다.
귀한 것을 소중하게 여기기는 그리 어렵지 않지만 흔한 것을 귀히 여기는 것은 진짜 사랑하는 마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꽃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귀한 꽃이 아름다운 꽃일 경우가 많다고는 해도 모든 귀한 꽃이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며, 흔한 꽃이 하나같이 아름답지 않은 것도 아니기에 꽃을 사랑함에도 ‘깊이’가 필요합니다. 아니 애초부터 ‘이 꽃은 아름답다.’라는 판단은 사실판단이 아니지요. 그러기에 한 송이의 꽃에서 내가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나보다 훨씬 행복한 사람이며 진정한 부자입니다. 그래서 늘 부럽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름다움’은 꽃에 자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꽃 안에서 그것을 ‘찾아내는'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꽃들은 우리가 그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든 지나치든 크게 상관하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들어가는 말이 길어졌는데 오늘은 이 계절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 흔하고 편안한 풀꽃 이야기 하나를 하려고 합니다.
닭의장풀이라는 묵직한 이름에 ‘어, 무슨 꽃이지?’ 할 수 있겠으나 그래요 맞습니다. 예전에 우리가 ‘달개비’로 알고 있었던 바로 그 꽃입니다. 여름의 문이 열리면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꽃이지요. 닭의장풀이 피지 않는 여름은 여름답지 않고, 닭의장풀이 피어있지 않는 아침 산책길은 뭔가 허전하고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저 편안하고 익숙해서 몸이 피곤하고 아플 때면 아무 생각 없이 기대어 쉴 수 있는 나의 낡은 소파처럼, 눈부시게 빛나지는 않으나 눈에 익고 몸에 맞아 언제든 되돌아 가 한참을 들여다 보고 싶은 그런 꽃입니다.
그러나 흔히 볼 수 있다고 해서 ‘언제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후에 길을 나서면 꽃잎을 앙 다물고 그 고운 속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꽃은 한 번 피면 내내 피어 있다가 며칠이 지나 지는 것이 아니라, 단 하루 한나절 피었다가는 져버립니다. 그래서 이 꽃을 보려면 오전에 집을 나서야 하지요. 흔하게 볼 수 있는 나팔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죽하면 나팔꽃의 영어 이름이 Morning Glory일까요? 이제는 힐링 센터 개발인지 뭔지로 산이 온통 깍여나가고 뒤집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우리 동네 뒷산에 피어나던 ‘산해박’(아래의 왼쪽 사진)도 오전에만 꽃잎을 여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특이한 모습에 반해 몇 년을 몰래 지켜보았는데, 꽃이 피는 시기에 맞춰 찾아가도 언제나 꽃잎을 닫고 있어서 그 이유를 알 때까지 꽤나 속을 태웠던 기억이 납니다.
반대로 밤에만 피는 꽃도 있지요. ‘달맞이꽃’, 또 ‘하늘타리’ (오른쪽 사진) 등은 밤에 피고 아침이면 꽃잎을 닫아버립니다.
그런가 하면 오후 2시가 넘어야 꽃잎을 여는 ‘개아마’나 ‘물고추나물’, ‘각시수련’등도 활짝 핀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시간을 잘 지켜가야 합니다. 까다롭지요. 왜 이렇게 번거롭게 꽃잎을 여닫는 일을 반복하는지 그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밤 동안의 추위에 꽃가루가 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밤에는 꽃잎을 닫는다고 생각했다는데 여름에 꽃가루가 언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밤 동안 내린 이슬에 의해 꽃가루가 젖고 무거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밤에 꽃잎을 닫을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 마른 꽃가루는 가벼워서 곤충에 의한 이동이 수월해지는데 꽃가루가 젖으면 꽃가루받이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지요. 어쨌든 꽃잎을 열고 닫는 데에도 에너지가 드는 것은 사실일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잎 여닫기에 드는 에너지 손실보다는 꽃가루의 보존이 훨씬 중요하다고 판단했다면 가능한 설명이 될 수도 있겠네요. 또 꽃가루받이를 해 줄 곤충들도 밤에는 활동을 접으니 그것 또한 계산에 넣어야겠지요? 아무튼 최소의 에너지를 사용하여 최대의 효과를 얻고자 하는 식물들의 수학 실력에는 늘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렵게 얻은 에너지를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계산은 몇 차 방정식일까? 나처럼 수학에는 재주가 없는 사람은 늘 궁금합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닭의장풀은 며칠간 계속 꽃잎을 여닫는 것은 아니고 하루 한번 아침에 꽃잎을 열고 오후가 되면 닫는 것으로 꽃의 일생을 마친다고 합니다.
닭의장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참으로 신기하고도 아름다운 구조를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그 꽃잎의 색...비칠듯한 파란색 혹은 분홍색, 때로는 흰색까지...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봅니다.
꽃은 반달 모양의 포에 싸여 있습니다.
그리고 꽃의 아래 부분에 마치 꽃받침처럼 보이는 투명한 것(외화피라고 부릅니다.) 이 3장 있네요.
꽃잎은 자세히 보면 3장인데 2장은 크고 둥글고 아름다운 색깔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아래쪽 1장은 투명하고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덜합니다.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바로 수술입니다. 닭의장풀이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가장 큰 매력 포인트이기도 하지요. 수술은 총 6개인데 그 중 2개는 꽃가루를 잔득 담은 채 아래쪽으로 길게 벋어 있습니다. 비교적 짧은 수술 3개는 자세히 보면 마치 리본 모양처럼 보이는데 꽃가루가 보이지 않습니다. 가짜 수술인 것이지요. (헛수술) 2개의 수술들의 한 가운데 길게 벋어 있는 또 하나는 암술입니다.
문제는 중간 부분의 수술입니다. 이 수술은 생김새는 헛수술과 같이 리본처럼 생겼습니다. 그러나 꽃밥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헛수술은 아니지요. 그래서 6개의 수술 중 3개는 헛수술이고 나머지 3개는 ‘참’수술이지요.
자, 이제 왜 이 녀석이 이렇게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 차례입니다.
많은 꽃들은 매개 곤충을 유인하기 위해 꿀을 만들기도 하고 향기를 뿜기도 하고 꽃가루를 풍성하게 만들어 내어 주기도 합니다. 꿀과 향기, 꽃가루까지 다 갖추었다면 경쟁에서 무척 유리하겠지요. 누가 좋을 걸 모르나요? 그러나 모든 것을 다 갖추는 데는 에너지가 많이 들어갑니다. 닭의장풀은 결단을 내립니다. ‘좋아, 나는 오직 꽃가루만으로 승부할테다!’ 전술이 세워졌으니 이제 전략이 필요해집니다. 꿀도 향기도 없다면 풍성한 꽃가루만으로 곤충을 유혹해야 합니다. 자잘한 수술만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지요. 그래서 화려하고 풍성해 보이는 가짜 수술을 만듭니다. 자, 이번에는 곤충의 입장에서 닭의장풀을 바라봅니다. 유난히 새파란 꽃잎 사이 풍성해 보이는 노란 꽃가루 덩어리는 눈에도 잘 띄고 또 그만큼 유혹적일 것입니다. 내려앉을 수밖에요. 닭의장풀 꽃술은 3-1-2 포메이션으로 무장한 축구팀 같습니다. 안쪽 수술 3개는 유인하는 역할, 가운데 수술에 곤충이 내려앉을 때 양쪽 2개의 수술이 재빨리 곤충의 몸에 꽃가루를 듬뿍 묻혀주는 것입니다.
그래도 의문점은 남습니다. 가운데 수술은 왜 헛수술처럼 생겼을까?
헛수술에 속아서 날아 온 곤충들에게 ‘너희가 완전히 속은 것은 아니야, 리본처럼 생겼다 해서 다 헛수술은 아니잖아.’라고 위로해 주는 것은 아닐테지요. 그렇다면 다음 꽃가루받이에 필요한 곤충들에게 큰 그림으로 포석을 깐 것일까요? ‘속은 것 같은 기분이 드니? 하지만 꼭 속은 건 아니야. 리본도 다 가짜는 아니고 어떤 리본은 꽃가루를 가지고 있잖아. 그러니 화내지 말고 다음에 또 와!!’ 속임수에도 품격이 있고 클래스가 있습니다.
닭의장풀은 곤충을 이용한 꽃가루받이를 위해 이토록 정교한 장치를 마련했지만, 그래도 행여 후손을 얻지 못할까 하여 제꽃가루받이를 하기도 합니다. 더구나 하루 한나절 피어있는 꽃, 만약 그 사이 곤충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꽃가루받이가 불가능하겠지요. 그래서 꽃잎이 오므라들면 암술이 또르르 말리듯 휘어들어가고 수술도 또한 암술을 감싸 안듯이 꼬이면서 제꽃가루받이가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물론 제꽃가루받이를 하게 되면 유전적으로 열성 형질이 나타날 확률도 높아지지만 아예 후손을 얻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판단이겠지요. 그래서 닭의장풀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꽃이 되었나 봅니다. 대단한 생존 전략이며, 치밀한 속임수 작전입니다. 나는 늘 이들의 치밀함과 대담한 생존 전략에 압도당하는 기분입니다. 너무도 익숙하여 한 번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셨다면,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그 비칠 듯 투명한 파란색의 꽃잎과 멋지게 뻗은 꽃술의 매력에 빠져 보십시오.
흔하다는 것은 그만큼 환경에 잘 적응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생존과 번식 전략이 탁월했다는 것이지요.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현명하기도 한 꽃, 그래서일까요? 닭의장풀의 여름이 조금은 시원하게 느껴지는 아침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익숙한 꽃의 새로움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아침, 아직은 낯설기만 한 새 집이지만 이제 시간을 들여 다듬고 닦아가며 익숙한 '내 집'을 만들어야 할 시간입니다.
Commelina communis L. 피자식물문 >백합강 >닭의장풀아강 >닭의장풀목 >닭의장풀과 >닭의장풀속 > 닭의장풀 꽃은 7-8월에 피고 잎겨드랑이에서 나온 꽃대 끝의 포로 싸여 파란색 ~ 하늘색 꽃이 핍니다. 포는 넓은 심장형이며 안으로 접히고 끝이 갑자기 뾰족해지며 길이 2cm로서 겉에 털이 없거나 있습니다(좀닭의장풀). 다른 설명은 위에서 충분히 했으므로 생략합니다. |